혼노지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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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노지의 변은 1582년, 일본의 유력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이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혼노지에서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아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오다 노부타다 역시 니조 고쇼 전투에서 자결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를 살해한 동기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여러 설이 존재하며, 원한, 야망, 시코쿠 문제 등이 주요 원인으로 거론된다. 사건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오다 가문의 후계자 결정 회의가 열리는 등 일본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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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의 변 | |
---|---|
위치 정보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혼노지의 변 |
일부 | 센고쿠 시대 |
![]() | |
날짜 | 1582년 6월 21일 |
장소 | 혼노지 및 니조 궁, 교토, 일본 |
좌표 | 35.005833°N 135.753889°E |
결과 | 아케치 군의 승리, 오다 노부나가와 오다 노부타다 사망, 아케치의 단명 통치 시작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아케치 미쓰히데의 지휘 하에 있는 오다 군 |
교전 세력 2 | 혼노지의 거주민 및 수비대, 궁정 신하, 상인, 예술가,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 |
지휘관 | |
지휘관 1 | 아케치 미쓰히데 아케치 히데미쓰 아케치 미쓰타다 이세 사다오키 사이토 도시미쓰 |
지휘관 2 | 오다 노부나가(전사) 오다 나가마스 오다 노부타다(전사) 오다 가쓰나가(전사) 모리 란마루(전사) 무라이 사다카쓰(전사) 마에다 겐이 |
병력 규모 | |
병력 1 | 13,000명 |
병력 2 | 7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불명, 추정상 최소 |
사상자 2 | 오다 노부나가, 모리 란마루, 오다 노부타다 및 다수 |
기타 정보 | |
관련된 전투 | 아카쓰카 전투 기요스성 전투 무라키성 전투 이노 전투 나가라가와 전투 우키노 전투 데라베 포위전 마루네 포위전 오케하자마 전투 이나바야마성 포위전 초코지 포위전 가네가사키 포위전 (1570) 아네가와 전투 이시야마 혼간지 전쟁 히에이산 포위전 나가시마 포위전 미카타가하라 전투 히키다성 포위전 오다니성 포위전 이치조다니성 포위전 이타미 포위전 (1574) 나가시노 전투 미쓰지 포위전 기즈가와구치 전투 시기산 포위전 데도리가와 전투 다카텐진 포위전 (1581) 돗토리 포위전 히지야마 포위전 다카토 포위전 (1582) 덴모쿠잔 전투 우오즈 포위전 혼노지 사건 |
2. 배경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고쿠 지방으로 진군하던 중 갑자기 군대를 돌려 교토의 혼노지에 머물던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급습하여 자결로 몰아넣은 사건이다.
1582년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숙적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키고[57][58]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쟁 세력이던 모리, 우에스기, 호조 가문 등은 여러 요인으로 약화되어 노부나가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6] (자세한 내용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 참고)
이 시기 노부나가는 서쪽의 모리 가문 공략에 힘을 쏟고 있었으며, 총지휘관인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다.[2] 이에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병력을 이끌고 히데요시를 도우러 가도록 명령했다.[6]
미쓰히데는 명령에 따라 단바에서 군대를 모아 서쪽으로 향하는 듯했으나, 행군 도중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교토로 향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열병식을 계획하고 있다고 속였다. 한편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지원하러 직접 출진하기에 앞서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교토의 혼노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의 주력 부대는 각지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혼노지의 경비는 매우 허술한 상태였다.[2]
혼노지에 다다른 미쓰히데는 군대를 향해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 本能寺に あり!일본어)"[396]라고 외치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1만여 명에 달하는 아케치 군의 기습에 노부나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결국 모리 란마루 등과 함께 자결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은 현재에도 일본에서 목표를 바꾸거나 내부의 적을 칠 때 비유적으로 사용되곤 한다.[397]
2. 1.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
1582년, 오다 노부나가는 센고쿠 시대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였으며,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혼란스러운 일본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6] 그해 초 덴모쿠잔 전투에서 숙적이던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키고[57][58] 일본 중부를 완전히 장악했다.[6] 오랜 기간 노부나가를 괴롭혔던 이시야마 혼간지 세력과의 이시야마 전쟁 역시 평화 조약으로 마무리된 상태였다.[6]당시 노부나가에게 대적할 만한 세력으로는 서쪽의 모리 가문과 북쪽의 우에스기 가문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우에스기 겐신 사후 우에스기 가문은 후계자 문제로 내분을 겪으며 세력이 약화되었고,[6] 간토의 호조 가문은 노부나가와 동맹 관계를 맺고 복속하는 태도를 보였다.[71] 도호쿠 지방의 다테씨, 모가미씨, 아시나씨 등 주요 다이묘들도 노부나가에게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63][65][66]
서쪽의 모리 가문 역시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약화되어, 다카마쓰 성이 포위되는 등 패색이 짙었다.[7] 모리 가문은 히데요시에게 성 5개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7]
이처럼 통일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노부나가는 더욱 적극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섰다. 그는 주요 가신들에게 각 방면의 공략을 명령했다.[6]
- 하시바 히데요시: 주고쿠 지방에서 모리 가문 공략 지속.
- 니와 나가히데: 시코쿠 침공 준비. 이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거부한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정벌하기 위함이었다.[72]
- 다키가와 가즈마스: 고즈케국과 시나노국에서 호조 가문 감시.
- 시바타 가쓰이에: 에치고국에서 우에스기 가문 공략.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킨 후, 노부나가는 아즈치성으로 개선했으며, 오랜 동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루가국을 하사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아즈치를 방문했다.[70] 이 무렵, 히데요시로부터 모리 가문의 반격에 대비한 지원 요청이 들어왔고,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히데요시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자신도 곧 출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2][6]
한편,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초기 노부나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영지를 인정받았으나,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노부나가의 영향력 아래 있던 미요시 가문과 충돌했다.[86] 당시 미요시 가문은 하시바 히데요시와 연계하여 노부나가에게 조소카베 가문의 견제를 요청했다.[90][91] 노부나가는 미요시 가문의 편을 들며 모토치카에게 점령지 반환을 요구했지만, 모토치카가 이를 거부하자[91] 노부나가는 3남 오다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삼아 시코쿠 정벌을 결정했다.[93] 이 과정에서 초기 양측의 중개역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는 입지가 좁아졌으며,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 변경은 미쓰히데의 체면을 깎는 결과를 낳았다.[83] 이는 훗날 혼노지의 변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93]
2. 2. 아케치 미쓰히데의 입장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중 한 명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는 긴키 지방 일대에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당시 오다 가문의 중신들이 이끄는 군단이 서국, 사국, 호쿠리쿠, 간토 등 각지로 출병한 상황에서, 기나이에 남아 유격군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미쓰히데의 입장이 특수했다고 평가한다.[144]미쓰히데는 오미, 단바, 야마시로에 직속 가신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조력 다이묘로서 다이고 미야즈성의 나가오카 후지타카·호소카와 타다오키 부자, 야마토 고리야마성의 쓰쓰이 준케이, 셋쓰 아리오카성의 이케다 쓰네오키, 이바라키성 및 타카쓰키성의 타카야마 우콘 등을 영향력 하에 두고 있었다.[97]
역사학자 타카야나기 미쓰히사는 저서 『아케치 미쓰히데』에서 미쓰히데를 사단장급이자 긴키군의 사령관, 즉 "긴키 관령"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었지만, 간토 관령으로 인정받던 타키가와 가즈이에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 평가라는 것이다.[98] 쿠와다 타다치카 역시 미쓰히데가 "긴키 관령이라고 할 만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동의했다.[98] 작가 쓰모토 요는 미쓰히데의 역할을 "오다 군단의 긴키 군관구 사령관 겸 근위 사단장이며, CIA 장관을 겸임하고 있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99]
실제로 미쓰히데는 오미, 단바 등의 직할령과 다이고, 와카사, 야마토, 셋쓰국의 조력 다이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을 뿐 아니라, 고슈 정벌 시에는 노부나가의 신변 경호를 담당했다. 또한 교토 부교 지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공가를 통해 조정과 교류했으며, 무라이 사다카쓰와 함께 교토 행정에 관여하고[100] 니조 고신조 건축 부교를 맡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덴쇼 9년(1581년) 교토에서 열린 대규모 군사 행진인 마소로에(馬揃え)에서 미쓰히데가 총괄 책임자를 맡은 것은[147] 이러한 그의 지위와 역할 때문이었다. 나가이 미치코와 같은 야망설 지지자들은 이 시기 미쓰히데가 오다 군단 내에서 노부나가 다음가는 "2인자"라는 자부심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한다.[101] 당시 다른 중신들인 타키가와 가즈이에와 다니와 나가히데 등이 간토 파견, 시코쿠 정벌 준비, 도쿠가와 이에야스 접대 등으로 바빴던 상황에서, 기동적으로 활동 가능한 인물은 "긴키 관령" 미쓰히데뿐이었다. 혼노지의 변의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적은 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교토에 머무르던 노부나가와 그의 아들 노부타다를 습격할 수단과 기회를 가진 것은 미쓰히데가 유일했다.
한편, 미쓰히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접대역을 맡았다가 서툰 일처리로 해임되어 노부나가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가와스미 타이코키(川角太閤記)』에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상한 생선 냄새가 진동하자 크게 화를 내며 접대역을 호리 히데마사로 교체했고, 모욕감을 느낀 미쓰히데가 준비했던 안주와 그릇을 호리에게 던져버렸다고 한다.[261][262] 『조산기담(常山紀談)』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26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에 사실로 받아들여져 원한설의 주요 근거 중 하나로 여겨졌다. 『가와스미 타이코키』는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받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과거 기후에서의 망신, 스와(諏訪)에서의 징계, 그리고 이 접대역 해임 사건으로 인한 체면 손상 등 세 가지 원한 때문에 반란을 결심했다고 서술한다.[189] 이 과정에서 아케치 히데미쓰, 사이토 도시미쓰, 미조오 시게토모(溝尾茂朝, 통칭 카쓰베에) 등이 미쓰히데의 결심에 동조했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다.[187][189]
그러나 이 일화의 신빙성은 낮다. 보다 신뢰성 높은 사료로 평가받는 『신장공기』에는 이에야스의 숙소가 미쓰히데의 저택이 아닌 다이호보(大寶坊)였으며, 미쓰히데는 접대역을 3일간 정상적으로 수행했고 해임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가와스미 타이코키』의 핵심 내용인 접대역 해임 사건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후대에 원한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학자 코와다 테츠오는 설령 해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미쓰히데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원래 3일간의 임무였을 수 있으며, 이 사건이 반드시 원한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264] 또한, 에도 중기에 쓰인 『조산기담』은 여러 출처의 일화를 혼합하고 변형하여 기록한 2차, 3차 사료이므로 신뢰도가 낮다.
2. 3. 시코쿠 문제
오다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 임무는 3남 오다 노부타카와 중신 다니와 나가히데가 총대장을 맡았다.[158] 이들은 1582년 5월 말, 이즈미와 셋쓰 지역(현재의 오사카부 일대)에서 약 1만 4천 명[154](미요시 가문 병력 6천 포함[155])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출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6월 2일(음력) 아와지섬으로 건너가고, 며칠 뒤 노부나가 본인도 합류할 계획이었다.[157]한편, 시코쿠 현지에서는 오다 가문에 협력하던 미요시 야스나가, 소가 마사야스 등이 선발대 역할을 수행하며 아와국(현재의 도쿠시마현)에서 조소카베 모토치카 측과 이미 교전 중이었다. 미요시 군은 5월에 쇼즈이성에 진입하여 이치노미야성과 에비스야마성(夷山城)을 공략하고, 이와쿠라성의 미요시 야스토시가 오다 측에 가담하는 등 아와 국의 절반 가량을 점령한 상태였다.[92][91] 이들은 노부타카가 이끄는 본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소카베 측은 하타야마성(畑山城)에서는 철수했지만, 가이후성과 오니시성(大西城) 등에서는 여전히 저항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92][91]
그러나 노부타카 군이 아와지로 도해하기로 예정된 바로 그날인 음력 6월 2일, 교토에서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면서 시코쿠 정벌 계획은 실행 직전에 무산되었다.
2. 4. 조정과의 관계
한편 오다 노부나가는 1578년(덴쇼 6년) 4월 9일에 우대신·우콘에다이쇼의 관직을 사임한[79] 이후 무관(無官)·산위(散位)로 있었다. 쇼닌 친왕에 대한 양위(讓位)를 두고 오기마치 천황과 의견을 달리했고, 1581년(덴쇼 9년) 3월 노부나가는 양위를 조건으로 사다이진 수락을 일단 승낙했지만, 천황이 금신(金神)을 이유로 양위를 중단했기에[80] 노부나가의 임관 이야기도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그래서 조정은 고슈 정벌의 승전을 계기로 축하 사자로 간슈지 하레토요(쇼닌 친왕의 의형)를 보냈고, 하레토요는 노부나가가 개선한 2일 후인 1582년(덴쇼 10년) 4월 23일에 아즈치에 도착했다. 『세이호 공기(晴豊公記)』에 따르면, 4월 25일(음력)에 노부나가를 다이조다이진 또는 간파쿠 또는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추대한다는, 소위 삼직 추임을 타진했고, 5월 4일(음력)에는 쇼닌 친왕의 친서를 덧붙인 두 번째 사자가 방문했다고 한다. 두 번의 사자에 당황한 노부나가가 모리 나리토시`(란마루)`를 하레토요에게 보내 조정의 의향을 알아보니, "노부나가를 쇼군으로 추대하고 싶다는 사자다"[81]라고 하레토요가 답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6일, 7일 사자를 환대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다.[82] 그 사이 5월 17일(음력)에 빗추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모리 데루모토가 곧 출진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출마 요청이 도착했다. 이를 받아 노부나가는 출진을 결의했고, 삼직 추임 문제는 그대로 미결된 채 혼노지의 변에서 변을 당했다.
3. 사건의 전개
1582년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씨를 멸망시키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실질적인 위협 세력은 서쪽의 모리 가문 정도만 남아 있었다. 노부나가는 모리 가문 공략 총책임자인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원하기 위해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출진을 명령했다.
덴쇼 10년(1582년) 5월 14일, 노부나가는 아즈치성에서 미쓰히데에게 군무를 해제하고 다음 날 도착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접대역(향응역)을 맡겼다.[172] 미쓰히데는 15일부터 3일간 이에야스 일행을 성대하게 접대했다. 그러나 17일, 히데요시로부터 모리 군의 후퇴 소식과 함께 지원 요청이 도착하자, 노부나가는 이를 기회로 보고 직접 출진하여 모리 가문을 토벌하고 규슈까지 평정할 계획을 세웠다.[151]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선봉을 명했고[151], 미쓰히데는 즉시 거성인 사카모토성으로 돌아가 출진 준비를 시작했다.
5월 19일, 노부나가는 소켄지에서 고와카 다유의 춤 공연을 관람하며 좋은 기분을 보였으나, 예정에 없던 노 공연을 시켰다가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심하게 질책하기도 했다.[151] 5월 20일, 이에야스의 향응역은 니와 나가히데, 호리 히데마사 등 4명에게 새로 맡겨졌다.[175][176] 5월 21일, 이에야스 일행은 노부나가의 권유로 교토 관광을 위해 출발했고,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도 교토로 와 묘각사에 머물렀다.[179]
5월 26일, 미쓰히데는 사카모토 성을 떠나 또 다른 거성인 단바 가메야마 성으로 이동했다. 27일에는 아이오산의 아이오 신사에 참배하고 오미쿠지를 여러 번 뽑았으며[140], 28일에는 렌가 모임(아이타쿠햐쿠인)을 열었다.[140]
5월 29일, 노부나가는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교토로 와 정숙소인 혼노지에 들어갔다.[140] 노부나가의 상락 목적은 모리 공격 출진 준비 외에도, 시마이 무네무로가 가진 명품 다기(나라시바 가타쓰키)를 얻기 위한 다회 개최[183], 혹은 역법 개정 문제 등 조정과의 교섭[184]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6월 1일,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고노에 사키히사 부자 등 공경들을 초대해 다회를 열었고, 묘각사에서 온 아들 노부타다와 술잔을 나누었다.[144] 심야에는 혼인보 산사와 가시오 리겐의 바둑 대국을 관전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185] 당시 혼노지는 해자와 흙담을 두른 성채와 같은 구조였다.[186]
같은 날 저녁, 미쓰히데는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단바 가메야마 성을 출발했다.[142] 그는 병사들에게 "노부나가 님께서 교토에서 군용(軍容)을 검열하신다"고 속이고 동쪽으로 향했다.[182] 시노무라 하치만구로 추정되는 곳에서[187] 아케치 히데미쓰, 사이토 도시미쓰 등 핵심 중신들에게 처음으로 노부나가 타도의 계획을 밝히고[189] 기쇼몬을 쓰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141] 미쓰히데 군은 통상적인 서국행 경로인 미쿠사야마 대신, 오이노사카 고개를 넘어 교토로 향했다.[187] 야간 행군 중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의심스러운 자는 베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실제로 농민 여럿이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193]
6월 2일 새벽, 가쓰라가와를 건너기 전 미쓰히데는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193][195] 이때 미쓰히데가 "敵は 本能寺に あり!|적은 혼노지에 있다!일본어"라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속설로 동시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199][200] 가신들조차 공격 목표가 노부나가라는 사실을 몰랐으며, 일부는 이에야스를 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196][197]
새벽녘, 아케치 군은 혼노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혼노지 내부에서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노부나가는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노부나가는 불타는 혼노지 안에서 자결했다. (자세한 내용은 #혼노지 습격 참조하십시오.)
한편, 묘각사에 있던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고 니조 고쇼로 옮겨 항전했으나, 역시 아케치 군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 패하고 자결했다. (자세한 내용은 #니조 고쇼 전투 참조하십시오.)
최근 연구에서는 미쓰히데 본인이 혼노지 습격 현장에 가지 않고, 약 8km 남쪽의 도바에 머물며 부하들에게 지휘를 맡겼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미쓰히데의 중신 사이토 도시미쓰의 아들 사이토 도시무네의 증언 기록인 『이쓰야노 가키모노』에 근거한다.[209]
사건 당시 혼노지 인근 남만사(교회)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도 사건을 목격했다. 루이스 프로이스 등이 기록한 『예수회 일본연보』에 따르면, 새벽 미사 준비 중 소란이 일어나 아케치의 반란 소식을 들었다. 아케치 군은 쉽게 절에 침입했고, 노부나가는 잠에서 깨어 씻던 중 등 뒤에서 화살을 맞았다. 그는 나기나타를 들고 싸우다 팔에 총탄을 맞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후 할복했다거나 불에 타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화재가 워낙 커서 정확한 최후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197][212][213]
3. 1. 혼노지 습격
아케치 미쓰히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주코쿠로 진군하던 중 갑자기 군대를 돌려 교토로 향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열병식을 계획한다고 병사들에게 알렸고, 병사들은 의심 없이 따랐다. 그러나 혼노지에 가까워졌을 때 미쓰히데는 "敵は 本能寺に あり!|적은 혼노지에 있다!일본어"[396]라고 외치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이 유명한 말은 하야시 라잔(1583~1657)의 『오다 노부나가 譜』[8]에 처음 등장하고, 이후 에도 시대 말기 학자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에 실린 것으로 보아,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9][10]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와 생존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쓰히데는 자신의 참모 외에는 목적지를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보 유출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이다. 공격이 시작될 때조차 병사들은 누구를 공격하는지 몰랐으며, 일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새벽(일본 음력), 교토는 이상 기후와 장마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미쓰히데는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전 6시경 혼노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2][6][4]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는 교토에 성을 짓지 않고 궁정과의 거리를 두려 했기 때문이다.[4] 게다가 주력 부대는 다른 지역의 전투에 파견된 상태여서, 혼노지에는 약 150명의 호위 병력만 있었다.[2][4] 혼노지는 해자와 석벽을 갖춘 요새화된 사찰이었지만[186],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는 방어에 한계가 있었다.[2][4] 헤이세이 19년(2007년) 혼노지 터 발굴 조사에서 당시의 해자, 석축, 흙담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다량의 불탄 기와와 토기도 출토되었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노부나가와 시종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소란으로 여겼으나, 이내 아케치 군의 함성과 총격 소리에 반란임을 깨달았다. 노부나가는 시동 모리 란마루에게 "누구의 소행인가?"라고 물었고, 란마루가 "아케치인 듯합니다"라고 답하자, 노부나가는 더 묻지 않고 "是非に及ばず|어쩔 수 없다일본어"라고 말하며 활로 응전하기 시작했다. 활시위가 끊어지고 예비 활마저 다 쓰자 창을 들고 싸웠으나, 적의 창에 팔꿈치를 다쳐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안쪽 방으로 물러나 시녀들에게 "나는 괜찮으니 너희는 어서 도망쳐라"고 말한 뒤[12][13], 불타는 혼노지 안에서 스스로 할복했다.[2][6][13] 모리 란마루와 그의 동생들인 보마루, 리키마루 등 많은 측근도 함께 전사했다. 아케치 군은 오전 8시경 포위를 풀었다.[4]
한편, 묘각사에 머물던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아버지의 위기 소식을 듣고 혼노지로 구원을 가려 했다. 그러나 무라이 사다카쓰 부자가 달려와 "혼노지는 이미 함락되었고 곧 이곳도 공격받을 것이니, 방어가 용이한 니조 신 고쇼로 피신해야 한다"고 설득했다.[205][223] 노부타다는 니조 신 고쇼로 옮겨, 그곳에 있던 동궁 사네히토 친왕과 와카미야(후의 고요제이 천황) 일행을 안전하게 탈출시켰다.[225][224] 이후 측근들과 군사 회의를 열었으나, 탈출 제안을 거절하고 "이런 반란을 일으킨 적들이 순순히 도망치게 둘 리 없다. 병졸의 손에 죽는 것은 후세까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226][223]고 결의했다. 그 사이 아케치 군은 니조 신 고쇼마저 포위했다.[227]
정오 무렵, 아케치 군 1만 명이 니조 신 고쇼를 공격했다.[227] 노부타다의 병력은 약 500명이었으나, 교토에 있던 노부나가의 마와리슈(직속 기마무사)들이 합류하여 1,000명에서 1,500명 정도로 늘어났다.[222][228] 노부타다 군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세 차례나 아케치 군을 물리치는 등 분전했으나[225], 코노에 마에히사 저택 지붕에서 쏘아대는 아케치 군의 총격에 사상자가 늘어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밀렸다. 아케치 군은 건물 안으로 난입하여 불을 질렀다.[226] 노부타다는 가마다 신스케에게 가이샤쿠를 명하고 할복했으며, 그의 시신은 지시에 따라 숨겨졌다.[226] 사이토 도시하루, 후쿠토미 히데카쓰, 스가야 나가요리, 이노코 헤이스케, 단 다다마사 등 많은 측근이 노부타다와 함께 순절했다.[232]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노부나가의 시신을 찾았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1582년 10월, 히데요시는 교토 다이토쿠지에서 노부나가의 실물 크기 목상을 만들어 화장하는 것으로 장례를 치렀다.[4] 노부나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거나, 너무 많은 시신과 섞여 구별할 수 없었다거나, 불길이 너무 강해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4] 노부나가 자신이 죽음보다 시신이 적에게 넘어가 능욕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여, 측근에게 시신을 불태우거나 숨기도록 지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 일본 각지에 노부나가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지만, 실제 유골이 묻혔다는 증거는 없다.[4]
혼노지와 니조 신 고쇼에서 전사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장소 | 이름 | 비고 |
---|---|---|
혼노지 | 오다 노부나가[234] | |
모리 나리토시 (란마루)[235] | 모리 요시나리의 셋째 아들 | |
모리 나가타카 (보마루)[235] | 요시나리의 넷째 아들 | |
모리 나가우지 (리키마루)[235] | 요시나리의 다섯째 아들 | |
코가와 아이헤이[235] | ||
다카하시 토라마츠[235] | ||
가네모리 요시이리[235] | ||
스가야 카쿠조[235] | 니조 고신조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음. 나가요리의 아들. | |
우오즈미 쇼시치[235] | ||
타케다 기타로[235] | ||
오츠카 마타이치로[235] | ||
카리노 마타쿠로[235] | ||
우스다 요고로[235] | ||
이마가와 마고지로[235] | ||
오치아이 코하치로[235] | ||
이토 히코사쿠[235] | ||
구구리 가메[235] | ||
타네다 가메[235] | ||
야마다 야타로[235] | ||
이이가와 미야마츠[235] | ||
소부에 손[235] | ||
카시와바라 나베마루 형제[235] | ||
이치운사이 신아미[235] | 도보슈 | |
히라오 쿠스케[235] | ||
오츠카 손조[235] | ||
유아사 나오무네[235] | ||
오구라 쇼쥬[235] | ||
니조 신 고쇼 | 오다 노부타다 | 노부나가의 장남 |
사이토 도시하루 (신고)[232] | ||
후쿠토미 히데카쓰[232] | ||
스가야 나가요리[232] | ||
이노코 헤이스케[232] | ||
단 다다마사[232] | ||
무라이 사다카쓰 (슌칸켄) | 아들들과 함께 전사 | |
오자와 로쿠자에몬[236] | ||
아카자 나오노리[237] | ||
반 타로자에몬[235] | 반 나오마사의 일족 | |
반 마사야스[235] | ||
무라타 키치고[235] |
사건 당시 혼노지에 있던 여성들은 노부나가의 지시로 탈출했고, 니조 신 고쇼의 사네히토 친왕 일행과 궁녀들도 양측의 협의 하에 탈출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모든 가신이 충절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나가마스(후의 우라쿠사이)는 노부타다를 따라 니조 신 고쇼에 있었으나, 다른 이들을 속이고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244][245] 당시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비겁하다고 비난했으며, "오다의 겐고(나가마스)는 사람이 아니네, 주군에게 배를 가르라 해놓고 자기는 안쓰치로 도망치네"라는 내용의 라쿠슈가 돌기도 했다.[246][245] 미즈노 타다시게 역시 니조 신 고쇼에서 탈출하여 교토에 잠복했다가 빠져나갔다. 마에다 겐이는 노부타다의 명에 따라 그의 아들 산포시를 데리고 기후 성을 거쳐 기요스 성으로 피신했다.[247][248][249]
노부나가에게 발탁되었던 흑인 무사 야스케는 묘각사에서 아케치 군에게 투항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는 살해당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252][254][255]
3. 2. 니조 고쇼 전투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묘각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을 듣고 아버지 노부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혼노지로 가려 했다. 그러나 무라이 사다카쓰와 그의 아들들이 달려와 이를 막았다. 무라이 사다카쓰는 혼노지가 이미 함락되었고 불타고 있으며, 적이 곧 묘각사로도 공격해 올 것이라며, 방어에 유리한 니조 고쇼(二条御所)로 가서 농성할 것을 조언했다.[205][223]노부타다는 이 조언에 따라 니조 고쇼로 이동했다. 니조 고쇼는 당시 황태자였던 세이닌 친왕과 그의 아들 와카미야(후의 고요제이 천황)가 머무는 곳이었기에, 노부타다는 그들을 안전하게 내리(内裏)로 피신시켰다. 무라이 사다카쓰가 아케치 측과 교섭하여 잠시 전투를 멈추었고[225], 아케치 군은 가마 사용은 금지했지만 걸어서 탈출하는 것은 허락했다[224]. 이때 연가사(連歌師) 사토무라 쇼하가 급히 가마를 마련하여 친왕 일행을 안전하게 내리로 옮겼다[225]. 노부타다는 또한 마에다 게니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 산포시(오다 히데노부)를 데리고 미노의 기후 성을 거쳐 오와리의 기요스 성으로 피신하라고 명령했다. 구교(公卿)와 뇨보슈(女房衆, 궁녀) 등 모든 사람들을 탈출시킨 후, 노부타다는 군사 회의를 열었다.[5][6][4]
측근 중 일부는 아즈치로 탈출할 것을 권했지만, 노부타다는 "이 정도의 반란을 일으킨 적이 우리가 쉽게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 도망치다가 이름 없는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은 후세까지 남을 치욕이다"라고 말하며 교토에 남아 싸우기로 결심했다.[226][223] 그 사이 아케치 군은 니조 고쇼를 완전히 포위하여 탈출이 불가능해졌다.[227]
정오 무렵, 아케치 군 약 1만 명이 니조 고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227] 노부타다의 병력은 약 500명이었으나, 교토에 있던 노부나가의 마와리슈(馬廻衆, 기마 호위대) 등이 합류하여 1,000명에서 1,500명 정도로 늘어났다.[222][228] 노부타다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격렬하게 저항했다. 약 1시간 이상[229] 문을 열고 나가 싸워 세 차례나 아케치 군을 물리치는 등 분전했다.[225] 오자와 로쿠로사부로(小沢六郎三郎)는 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노부타다에게 인사하고 문 방어에 참여했으며[226], 병으로 누워있던 가지와라 가게히사의 아들 마쓰치요(松千代)도 가신 마타에몬(又右衛門)과 함께 달려와 노부타다에게 장도를 하사받고 싸우다 전사했다.[51] 그러나 아케치 군은 인근 고노에 마에히사의 저택 지붕에 올라가 활과 조총으로 공격하여 노부타다 측 사상자가 늘어났고, 결국 아케치 군은 고쇼 내부로 진입하여 건물에 불을 질렀다.[226]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노부타다는 할복을 결심하고, 가마타 신스케에게 자신의 시신을 적에게 넘기지 않도록 숨기라고 지시하며 가이샤쿠(介錯, 할복을 돕는 행위)를 명했다. 가마타 신스케는 노부타다의 목을 베어 지시에 따라 시신을 숨겼다.[226] 노부타다와 함께 싸웠던 가신들 대부분도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니조 고쇼 전투 주요 전사자'''[239]
이름 | 비고 | 이름 | 비고 |
---|---|---|---|
오다 노부타다 | 노부나가의 장남 | 단 타다마사 | |
오다 나가마스 | 노부나가의 동생 | 사카이 에치젠노카미 | 사카이 마사나오의 아들 |
쓰다 겐자부로 | 노부나가의 다섯째 아들 | 사쿠라기 덴시치 | |
쓰다 간시치(모토히데) | 일문중 | 사카가와 진고로 | |
쓰다 고토우지 | 일문중 | 하토리 고토우타 | |
사이토 도시하루 | 사이토 도산의 막내아들 | 오자와 로쿠로자부로 | 부교중 |
무라이 사다카쓰 | 부교중 | 하토리 로쿠베에 | |
이노코 헤이스케 | 미즈노 구조 | ||
후쿠토미 히데카쓰 | 부교중 | 야마구치 고벤 | |
노노무라 마사나리 | 부교중 | 야마구치 한시로 | |
시노카와 효고 | 하나와 덴자부로 | ||
시모이시 요리시게 | 고노 요시시로 | ||
시모가타 야자부로 | 데라다 젠에몬 | ||
모리 요시카쓰 | 무라이 사쿠에몬 | 사다카쓰의 장남 | |
모리 이와 | 요시카쓰의 아들 | 무라이 세이지 | 사다카쓰의 차남 |
아카자 나가카네 | 무라이 신에몬 | 사다카쓰의 동생 | |
스가야 나가요리 | 부교중 | 고베 지로사쿠 | |
스가야 가쓰지로 | 나가요리의 아들 | 오와키 기하치 | |
히라코 타네요시 | 나가요리의 가신 | 이누카이 마고자부로 | |
쓰다 모토요시 | 이시구로 히코지로 | ||
나가이 신타로 | 오치 고주로 | ||
가스가 겐파치로 | 히라노 신자에몬 | ||
다네무라 히코지로 | 히라노 간에몬 | ||
구와하라 스케로쿠 | 미즈노 소스케 | ||
구와하라 구조 | 이노우에 마타쿠라 | ||
무라세 도라 | 이이 도시나리 | ||
사사 세이조 | 가쿠세이인의 남편 | 가토 다쓰 | |
이시다 마고자에몬 | 다케나카 히코하치로 | 시게하루의 아들 | |
미야타 히코지로 | 가와사키 요스케 | ||
아사이 세이조 | 가지와라 마쓰치요[51] | ||
다카하시 후지 | 가지와라 마타에몬[51] | ||
오가와 겐시로 |
※ 마쓰노 가즈타다와 도가타 지로베에는 변 당시 현장에 없었으나, 후에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242]
※ 노노무라 마사나리는 농성에 참여하지 못하고 할복했다는 설도 있다.[203]
한편, 모든 가신이 순절한 것은 아니었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나가마스와 미즈노 타다시게는 노부타다를 따라 니조 고쇼에 들어갔으나, 전투 중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244][203] 특히 나가마스는 노부타다에게 할복을 권유하고는 자신은 도망쳤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이를 조롱하는 라쿠슈(落首, 풍자시)가 교토 거리에 나돌기도 했다.[246][245] 마에다 게니는 노부타다의 명에 따라 산포시를 데리고 기후 성을 거쳐 기요스 성으로 무사히 피신했다.[247][248][249] 노부나가에게 발탁되었던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는 묘각사에서 아케치 군에게 잡혔으나, 예수회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아케치 측이 그를 동물처럼 여겨 죽이지 않고 남만사(南蛮寺, 예수회 교회)로 보냈다고 한다.[252][253][254] 그 이후 야스케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254][255]
4.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 동기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명확한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일본 역사상 큰 수수께끼 중 하나로 남아 있다.[291][298]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설이 제기되었으나[2], 어느 것도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295]
에도 시대부터 오랫동안 주된 동기로 여겨진 것은 개인적인 원한[296]이나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망[311]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욕을 당하거나[256]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261][265] 여러 일화가 군기물 등에 전해진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접대 역할에서의 실수로 질책을 받거나 해임되었다는 이야기[261], 단바와 오미 영지를 몰수당하고 미정복지인 이즈모·이와미로 이봉될 것이라는 이야기[265]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1579년 야카미 성 공략 당시 미쓰히데가 인질로 보낸 어머니를 노부나가가 하타노 히데하루 형제를 처형하는 바람에 하타노 측이 보복으로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6]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33][37][264][265], 특히 어머니 인질 설은 1차 사료에 기록이 없고 최근 연구에서 반박되고 있다.[35][36] 원한설의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야망설 역시 미쓰히데의 야심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부족하다.[318]
20세기 이후에는 미쓰히데가 아시카가 막부나 조정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부나가의 정책(예: 천황 퇴위 강요 시도, 신격화 시도 등)에 반발하여 거병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33][38] 특히 아타고 신사에서 열린 연가 모임에서 미쓰히데가 읊은 발구(発句) '時は今 雨がした滴る皐月かな|토키와 이마 아메가시타 시타타루 사츠키카나일본어'는 '도키(土岐) 가문 출신인 내가 천하를 다스릴 때가 왔다'는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되어 야망설이나 막부 부흥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38][268] 후지타 다쓰오는 미쓰히데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다시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가졌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39][40]
비교적 최근에는 미쓰히데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었다는 음모론(흑막설)도 다수 등장했다.[33] 하시바 히데요시[41], 도쿠가와 이에야스[41], 모리 데루모토[2], 불교 세력(히에이잔 엔랴쿠지, 이시야마 혼간지 등)[2], 조정 및 공가(오기마치 천황, 고노에 사키히사 등)[33], 아시카가 요시아키[33], 예수회[33] 등이 흑막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흑막설들은 대부분 명확한 사료적 근거가 부족하거나[33], 오히려 반증이 제시되기도 하여[33]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305]
2010년대 이후 새롭게 주목받는 설은 '시코쿠설'이다.[334] 이는 미쓰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조소카베 모토치카와의 외교 교섭을 담당했으나[6], 노부나가가 시코쿠 정벌 방침으로 전환하면서[93] 외교 담당자로서의 입지가 좁아지고, 인척 관계[87]이기도 했던 사이토 도시미쓰 등 가신들의 불만도 커져 결국 모반에 이르렀다는 설이다.[6][43] 최근 발견된 사료[335]는 이 설을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336],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력한 동기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44]
이처럼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 동기에 대해서는 원한, 야망, 불안, 정치적 명분, 특정 세력의 음모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결정적인 증거 부족으로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혼노지의 변은 여전히 많은 의문을 남긴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5. 사건의 결과 및 영향
아케치 미쓰히데는 불타버린 혼노지 폐허 속에서 노부나가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3][4] 노부나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의 생사 여부를 불확실하게 만들어 미쓰히데에게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가능성이나 생사 여부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은 잠재적 지지자들이 노부나가의 보복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시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살아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노부나가 가신들의 협력을 얻어 미쓰히데를 공격하는 데 이용했다.[3][4] 미쓰히데는 교토 인근의 오다 가신들을 설득하고 궁정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으나, 그의 호소에 응답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한편, 주고쿠 지방에서 모리씨와 대치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사건 다음 날 소식을 접했다.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 씨와 강화를 맺고, 노부나가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채 '주고쿠 오가에시'(中国大返し일본어)라 불리는 초고속 강행군으로 기나이로 귀환했다. 약 1주일 만에 200km를 행군하여 약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히데요시는 오사카에서 니와 나가히데, 오다 노부타카 등과 합류하여 교토로 향했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 군을 격파했다. 패주하던 미쓰히데는 오치무샤가리(落武者狩일본어, 패잔병 사냥)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14] 이로써 미쓰히데의 권력 장악 시도는 십여 일 만에 끝나 '삼일천하'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미쓰히데 사후, 오다 가문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해 기요스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오다 가문의 주요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그리고 미쓰히데를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가 참석했다. 후계자 후보로는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 삼남 노부타카, 그리고 장손이자 노부타다의 아들인 산포시(당시 3세)가 거론되었다.[15]
미쓰히데를 물리친 히데요시 역시 노부나가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1582년 10월, 히데요시는 교토의 다이토쿠지에서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치렀다. 시신 대신 실물 크기의 노부나가 목조상을 만들어 화장하고 그 재를 항아리에 담았다.[4] 노부나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불길이 너무 강해 시신이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설(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서 뼈조차 재가 되었다고 기록했다[4]), 시신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는 설, 혹은 누군가에 의해 혼노지 밖으로 옮겨졌다는 설 등이 있다.[4] 일본 각지에 노부나가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이 여럿 있으나, 실제 시신이나 유골이 매장되었다는 증거는 없다.[4]
사건 당시 혼노지와 니조 고신조에는 많은 인물들이 있었으나, 일부는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나가마스(후일 유라쿠사이)는 노부타다를 따라 니조 고신조에 있었으나 탈출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비판받았으며, 그를 조롱하는 라쿠슈(落首일본어, 익살스러운 시나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246][245] 미즈노 다다시게 역시 니조 고신조에서 탈출하여 살아남았다. 마에다 겐이는 교토를 탈출하여 기후성으로 가서 노부타다의 아들 산포시를 보호하고 기요스성으로 퇴각했다.[247][248][249] 노부나가를 섬겼던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는 묘각사에 있다가 아케치 군에게 투항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252][254][255]
사건 당시 미쓰히데가 외쳤다고 전해지는 "敵は 本能寺に あり!일본어" (적은 혼노지에 있다!)[396]라는 말은 후대의 기록(아케치 군기, 하야시 라잔의 기록 등)에 등장하며[199][200], 현대 일본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관용구가 되었다.[397]
혼노지의 변은 오다 노부나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일본 전국 시대의 판도를 크게 바꾸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 일본 통일을 완수하며 센고쿠 시대의 종결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쿠데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 예수회 음모설
立花京子|다치바나 교코일본어가 《노부나가와 십자가》라는 책에서 제창한 설이다. 이 설은 조선과 명 등 아시아 침략을 계획하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가 일본의 정권 교체를 위해 혼노지의 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1] 설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 정권은 예수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예수회는 노부나가의 후원자였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예수회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 확장 정책 의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자 예수회는 노부나가가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예수회가 기리시탄(당시 일본의 가톨릭 신자)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를 사주하여 노부나가를 암살하게 했다는 것이다.[1] 하지만 이 설은 신뢰도가 낮은 자료인 '아케치 군기'(明智軍記) 등을 검증 없이 인용했다는 점에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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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任退治記』によると、信忠の手勢が500名で、京都に滞在していた馬廻りで、馳せ参じた者が1,000騎余と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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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智光秀は、天正3年(1575)7月に織田信長から「惟任」の名字と「日向守」の官職を与えられて'''惟任日向守光秀'''と称している(『信長公記』)。その後、光秀は惟任と称し続けているため、天正10年6月2日時点では「惟任光秀」が正しい名乗りであったこと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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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氏]]の惣領信勝の死後、穴山信君の嫡男[[穴山勝千代|勝千代]]が家督を継ぎ、穴山氏は信長によって本領安堵された。さらに勝千代の早世後も、徳川家康の5男[[武田信吉|信吉]]が養子に入って継いだので、名目上は武田氏は滅亡しておらず続い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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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は「天下の儀も御与奪なさるべき旨、仰せらる」(信長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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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造寺氏との信長の外交状態についてはよくわかっていない。ただしこのころ、龍造寺氏と毛利氏は同盟関係に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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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長包囲網は、京を追われた将軍足利義昭の主導するものであり、三職推任問題などでも将軍が依然として存在する事実は障害となっており、義昭を匿う毛利氏を打倒することは信長が名実共に天下平定を宣言するために必要不可欠となっ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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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元物語』によると、堺商人宍喰屋一廉の仲介によると云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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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吉は中国攻めの総大将であるだけでなく、北面する備前国の宇喜多氏とも近しい関係にあり、讃岐・阿波での情勢に強い影響力と関心を持っ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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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大河ドラマを子供に見せてはいけない…明智光秀が本能寺で信長を襲った理由は「私怨」ではない 歴史への誤解を植え付ける恐れがある (3ページ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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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原美術館所蔵の古文書研究における新知見について―本能寺の変・四国説と関連する書簡を含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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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科書とはひと味違う日本史のだいごみ : ポケット図解
秀和システム
[311]
서적
明智光秀
吉川弘文館
[312]
논문
[313]
서적
완역 프로이스 일본사 3 (오다 노부나가편 3)
중앙공론신사
[314]
서적
명량홍범 : 25권 속편15권
{{NDLDC|990298/244}}
국서간행회
[315]
논문
[316]
서적
雑史集
{{NDLDC|1906666/231}[...]
国民文庫刊行会
[317]
논문
[318]
논문
[319]
논문
[320]
논문
[321]
논문
[322]
서적
日本の历史 天下一統
中公文庫
[323]
서적
信長と消えた家臣たち
中央公論新社
[324]
문서
司馬遼太郎の発言
[325]
논문
[326]
논문
[327]
논문
[328]
서적
織田信長 中世最後の覇者
[329]
서적
信長の天下布武への道
吉川弘文館
[330]
간행물
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 第3期第4巻 1570年-1577年
1573-04-20
[331]
논문
[332]
웹사이트
突発説、単独犯行説、黒幕説…「主殺し」の真の動機は何か, 『歴史街道』 2012年5月号
http://ironna.jp/art[...]
iRonna
2015-08-11
[333]
논문
[334]
뉴스
本能寺の変直前の手紙 長宗我部元親、信長に恭順の姿勢
http://www.47news.jp[...]
2014-06-24
[335]
뉴스
長宗我部元親の手紙発見 本能寺の変直前、信長に恭順の姿勢
http://www.sponichi.[...]
2014-06-23
[336]
뉴스
本能寺の変・四国説後押しの新資料 - 林原美術館などが発見
https://news.mynavi.[...]
2014-06-26
[337]
뉴스
本能寺の変、なぜ起きた 謎に迫る長宗我部書簡見つかる
http://www.asahi.com[...]
2014-06-24
[338]
서적
織田信長〈天下人〉の実像
講談社
2014-08
[339]
서적
織田信長の東瀬戸内支配
和泉書院
[340]
서적
検証 本能寺の変
吉川弘文館
[341]
뉴스
「本能寺の変」10日前の生々しさ…新史料に驚きの調査員や作家ら
http://www.iza.ne.jp[...]
2014-06-24
[342]
서적
真説 本能寺、だれが信長を殺したのか 本能寺の変・新たな視点
[343]
논문
[344]
논문
[345]
서적
秀吉の陰謀
詳伝社
[346]
서적
本能寺の首謀者は秀吉である
第一企画出版
[347]
논문
[348]
서적
完全解明明智光秀の謎
つむぎ書房
[349]
서적
風雲信長記 : 激情と烈日の四十九年
学習研究社
[350]
서적
明智光秀の丹波統一
戒光祥出版
[351]
書籍
[352]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20『激闘織田軍団』
学習研究社
[353]
書籍
信長殺し、光秀ではない
[354]
문서
[355]
방송
堂々日本史
NHK
1998-07-14
[356]
書籍
信長権力と朝廷
岩田書院
[357]
書籍
信長と天皇―中世的権威に挑む覇王
[358]
書籍
[359]
書籍
記憶の歴史学 ─史料に見る戦国
[360]
書籍
日本中世の歴史7 天下統一から鎖国へ
吉川弘文館
[361]
웹사이트
『潮流』「本能寺の変」と現代
https://www.hiroshim[...]
中国新聞
2014-06-28
[362]
書籍
明智光秀 つくられた「謀反人」
[363]
웹사이트
明智光秀書状 [天正一〇年(一五八二)土橋平尉(重治)宛]
http://www.forest.mi[...]
みのかも文化の森/美濃加茂市民ミュージアム
2021-07-27
[364]
학술지
足利義昭黒幕説を検証する
[365]
문서
[366]
학술지
本能寺の変の黒幕は足利義昭か
新人物往来社
[367]
웹사이트
本能寺の変は室町幕府再興が目的か 光秀直筆の書状を確認
http://www3.nhk.or.j[...]
[368]
웹사이트
本能寺の変、目的は室町幕府の再興だった? 明智光秀直筆の書状から分析 信長に追放されていた第15代将軍・足利義昭の帰還計画が書状から明らかに。
https://nlab.itmedia[...]
[369]
웹사이트
「本能寺の変は幕府再興目的」 光秀 謀反直後の書状原本
https://web.archive.[...]
[370]
웹사이트
光秀「書状」原本発見 「本能寺の変」直後に反信長の豪族に協力要請、識者「室町幕府再興説を裏付け」
https://web.archive.[...]
[371]
웹사이트
本能寺の変 義昭黒幕説も 論争は続く
https://headlines.ya[...]
[372]
웹사이트
明智光秀 密書の原本発見 本能寺の変直後、反信長派へ
https://mainichi.jp/[...]
[373]
웹사이트
光秀の狙いは室町幕府再興か 「本能寺の変」10日後の書状原本発見
http://news.livedoor[...]
[374]
웹사이트
明智光秀が、「本能寺の変」直後に書いた手紙が見つかった
https://www.huffingt[...]
[375]
웹사이트
本能寺の変後、光秀の直筆手紙 紀州の武将宛て
https://web.archive.[...]
[376]
웹사이트
謀反直後の光秀書状原本 室町幕府再興説裏付けか 2017/9/12 3:00
https://www.nikkei.c[...]
共同通信社/日本経済新聞
[377]
웹사이트
本能寺の変は室町幕府再興が目的か 光秀直筆の書状を確認9月12日 3時58分
https://www3.nhk.or.[...]
日本放送協会
[378]
학술지
信長謀殺の真犯人 羽柴秀吉黒幕説
[379]
書籍
妖説太平記
[380]
학술지
毛利輝元黒幕説を検証する
[381]
학술지
推理! 信長謀殺の真犯人 徳川家康黒幕説
[382]
문서
[383]
書籍
[384]
문서
[385]
書籍
敵は本能寺にあらず
双葉社
[386]
저널
추리! 노부나가 암살의 진범 사카이 부유 상인 배후설
[387]
서적
명치 고우히데 만들어진 반역자
PHP연구소
[388]
서적
노부나가와 십자가 천하포무의 진실을 쫓다
슈에이샤 신서
[389]
서적
(제목 정보 없음)
[390]
서적
천정 10년의 자료만이 증명하는 본능사의 변의 진실
실업之日本사
[391]
웹사이트
명치 고우히데 자손이 말하는 본능사의 변 2 초소가부 정벌에서 신체의 위험이
https://www.asagei.c[...]
Asagei plus
2015-07-26
[392]
웹사이트
오다가 18대 당주 오다 노부타카 오다묘 종가를 명칭하는 곤란한 사람 1/2 주간 아사히 AERA dot 아에라닷
https://dot.asahi.co[...]
[393]
웹사이트
노부나가는 왜 본능사의 변의 진실을 명치 고우히데의 자손이 해명했다
https://lite-ra.com/[...]
리테라 주식회사 사이조
2014-12-22
[394]
서적
이와나미 강좌 일본 역사
{{NDLDC|1920813/77}}
이와나미 서점
[395]
웹사이트
적본주의
https://kotobank.jp/[...]
코토뱅크
2015-05-28
[396]
문서
이 말은 미쓰히데가 한 말이 아니라, 에도 시대의 라이 산요가 기록한 말이다.
[397]
서적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역사편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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